
변명11
날들에 대해
모두가 취하길 바랍니다. 비틀거리는 길 위에서 나를 잊기를.
거미눈같은 그들의 눈을 난도질해 없애 버리고만 싶은 날. 수백개의 시선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하나의 언어에서 파생되는 무수한 사건들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날, 우리의 만남을 예견할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의 현과 헤머의 반응은 연속적이어서 떨어질 수 없듯 그들의 시선은 자꾸만 저에게 소리내라 하더군요. 비가오는 날이면 그저 건반으로 돌아가, 땅에 그림자를 드리우고싶습니다. 바람을 타고, 아스팔트 위에 스며드는 그런 삶을요. 소리는 내지 않고 그저 그림자만 드리우다 사라져버리는 그런 삶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저는 여전히 9분할 모니터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9에서 12로, 12에서 다시 1로 잠깐의 터치만으로 확대되어 제 속을 비춰야만 하는 노이즈 속에서 나는 어떤 글을 쓰나요? 초록 계단 위, 죽은 감나무에서 떨어져나온 나무 껍질을 발견했을 때의 비탄함을 씁니다. 아무도 읽지 않아서. 그래서 씁니다. 거미눈을 유일히 피할 수 있는 순간, 아무도 찾지않는 그런 글을 씁니다. 1에서 다시 9로, 9에서 12로 돌아온 그곳에서 속이 메말라 건조함에 까맣게 그을러버린 나무 속을 봅니다. 가만히 내려다 보니, 어느 순간 노이즈는 1을 가르키고 있더군요. 안녕하세요, 우선은 올라가봐야겠습니다. 웃음과 동시에 인사하며 초록계단을 밟고, 불투명 유리를 두들겨 들어갑니다. 허리조차 편히 펼 수 없는 곳에서 열심히 허공의 먼지를 응시하다 간헐적으로 춤을 추는 상대를 보며 웃습니다. 진심을 다해서요. 그들의 눈을 난도질 해 없애버리는 상상을 하면서요. 그들이 취해, 더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기를. 존재 자체를 잊어주기를.
헤머가없는 피아노가 익숙한 세상에서 살고싶습니다. 스며드는 소리와 드리우는 소리가 소음이되는 곳에서 페달만 밟고싶습니다. 진공음이 공기가 되고, 그 속에 거미줄을 쳐 스스로의 눈을 갉아먹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아무도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모르게, 스스로도 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길 바랍니다. 그저 사라져 버리는 날들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