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향F 2021. 1. 26. 14:46

변명15
 
숨은 불안에 대해
 
생각이 두렵다. 지금껏 남들과의 싸움이라 생각해왔건만, 마음 한 켠엔 나와의 전쟁이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내 탓하지말자, 이번만큼은 나의 잘못은 없었으리라. 은연 중에 주문을 걸었지만 중학생시절 친구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냥, 어느순간부터." 내가 미워졌다는 말. 오늘도 어디선가 터지고 있을 하나의 행성처럼 당연하다는 듯한 어투였다. 사람은 그냥 미워질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내 탓이 아니다. 아니, 그래서 내 탓인걸까. 모든 인과관계에 놓인 모순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어느 것 하나 정답을 내어주지 않으니.
 
한동안 글쓰기를 배척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게되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고만 있었다. 열차의 흔들림에 맞춰 다가오는 사람들의 소음만큼 쿵, 쿵, 자꾸만 밑으로 꺼져버리는 심장을 붙잡고만 있었다. 심장을 그러쥐었다. 과하게 팽창된 근육에 떨림이 느껴지는 순간, 글을 쓰고 있다. 그래, 이번에도 결국은 어딘가에 내 탓이 숨어 있겠지. 언제쯤 도망칠 수 있을까 지긋한 굴레. 마냥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를 안쓰러이 여긴 적이 있는 사람에게, 나사가 점차 풀려가는 쳇바퀴를 안쓰러이 여긴 적은 있나요. 무형물이라는 이유로 하대 받은 그들이 살아 움직인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를 먼저 죽일까요. 누구를 안아줄까요.
 
뻥 뚫린 세상을 보고 있으면 막힌 화면을 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구부정한 목으로 눈알을 열심히 굴려대고. 반경 밖의 소음을 잡으려 귀는 쫑긋, 정작 다가오는 사람들의 소리는 듣지 못하고 헛것에 귀를 기울인다. 기침 소리, 웃음을 참는 소리, 그러다 화들짝. 심장이 자꾸만 내려앉는다. 그저 따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저 배척하고싶은 사람도 있을 터다. 남을 위해서일까 우울 속 이기적인 배려만 해서일까!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된다면 나도, 쪽팔림따윈 없앴을텐데. 배척당한 사람은 떠나야한다. 중이 떠난 절은 미친듯한 호황을 누린다더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의 행성은 밝은 빛을 내뿜으며 터져버리고 있겠지.
 
수억년전, 비루한 생을 화려히 마감한 오리온자리를 본다. 영원히 자신의 죽음을 박제시켜야하는 애탄한 별 자리. 너희는 너희들의 존재를 서로 알며 살아갔었니, 묻고싶지만 대답없는 혼란 뿐일테다. 사랑받고자하는 욕구가 동일하니 미움받는 사람이 생길수밖에. 편견이 있다. 작가들은 모두 다이나믹한 인생을 살았다는 그런 편견. 오히려 글쟁이들은, 자신의 삶을 "지루하다" 표한다. 자신에게 도래한 상황을 하나의 소재로 풀어내고, 모순에 대해 정의하고, 감정을 상황을 하나의 문장들을 엮어 써내려야하니 참으로 무감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자신의 삶을 자신의 감정을 대신 공감해줄 대리인이 필요하다. 지금 나의 상태를 진단하고 위로하는 헌신적인 대리인이. 대리인을 구하지못한 작가는 끝내 문들어져간다. 수차례 자살시도 끝에 불륜상대와 함께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도 대리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글은 참 쉽다. 누군가는 누구나 쓰는 것이 글이라 표한다. 약간의 배움으로도 뛰어나게 쓸 수 있고, 약간의 고뇌만으로 멋진 혹은 중이병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한다. 그들에게 있어 글의 정의가 무엇인진 모르겠으나, 그들의 말로 누군가는 지금 자살시도를 하고 있을 수도. 모두가 말을 잊었으면 한다. 말의 무거움과 무서움을 몸소 느끼기를 바란다.
 
쉬운 글을 써서 후자의 사람이 되어버렸나. 지긋한 관계의 연속에 손목이 저리다. 무감각함이 문제였을까. 스스로를 돌보지않는 어리석음이 문제였을까. 덜 자라 그렇다. 배우지 못해 그렇다. 어리석음이 문제다. 결국은 나에게로 회귀하다. 부정에 실패하다. 천명이다. 숙명일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