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향F 2021. 1. 26. 14:53

변명17
 
기록에 대해서
 
아무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공개되지 못한 나의 모든 글에 적혀 있던 공통된 말이다. 아무도 나를 묻지 않고 기록하지 않아 나는 나를 기록하나. 공개되지 않을 무수히 많은 글들과 계정들은 '나의 유언장'이라는 명목으로 먼지에 뒤덮여가고 있다. 항상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면서 나는 흔적을 두고 떠난다. 아, 이 어찌나 미련한 사람이란 말인가. 터널에 갇혀 왈라의 노래를 부르는 '나'와, 죽어서 식물이되어서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열매의 아버지에게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들 그러고 살아간다. 내 뼛가루도 앵두나무에 뿌려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뿌려지길 기도해야 할까. 기도할 곳 없는 무신론자는 오늘도 신의 존재를 원망한다.
 
멜라니 클라인은 아이가 어머니와 분리될 때 상실감을 느끼며 비로소 자아를 갖추어 나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상실감은 무엇이었나. 나는 상실한 적 없어 상실을 찾아다니나. 상실을 찾으며 나를 찾아다니는 거지.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래, 상대를 향한 나의 걱정 배려 분노 기쁨 예의 행복은 그렇게 상실되어 간다. 나는 결국 상실했고 어딘가에 고여 있지를 못하니까. 나는 그렇게 부유한다. 햇빛을 받는 한낱 먼지가 될 수 있다면 나는 모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텐데.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을 텐데. 나를 이해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게. 나의 기록을 선사하고싶다. 사실,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렇게 추악하고, 역겨운 사람이라고. 그럼에도 내 곁에 남아줄 건가요. 아니다, 나는 또다시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내밀 테지. 나는 모순이라는 단어가 좋다. 인간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이 말고 더 있을까.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을 나열하기'를 했다. 우울감, 무력감, 나태감을 차례로 나열했다. 선생님은 내게 더 없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그것이 문제라고 했다. 감정의 발전이 없는 것. 감정의 발전은 무엇일까. 설리반은 말한다. 유아기의 가장 큰 욕구는 안전과 친밀감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발전할 수 없는 사람일까. 일반 사람들은 대게 분노, 힘듦, 짜증, 슬픔을 나열한다고 한다. 나랑 다를게 뭐가 있느냐 물으니 단어 자체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나는 여전히 나의 감정을 분석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게 문제인가요. 라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감'처럼 감정을 분석해내지말고 감정 자체에 집중하라고 하는 말이란다. 나는 그게 참 어렵다.
 
로라반을 권고 받았다. 로라반, 로라반, 로라반. 지긋지긋한 이름. 나는 벗어나고싶지 않다. 나의 우울감에 대해, 나의 무력감에 대해, 나태감에 대해. 나는 그냥 나대로 흘러갈 거고 그렇게 살아갈 테지. 나의 틈을 발견해내는 당신들의 추잡함을 나는 안고 살아갈 거다. 아무도 묻지 않는 나의 감정을 기록하고, 하루를 기록하고, 비공개로 남겨두고. 나는 앵두나무에 뿌려질 때 물을 거다. 죽어서야 나를 이해(한다고) 할 당신들은 당신의 폭력을 알고 있었나요.
 
나는 이제 당신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