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4월 03일

남겨진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스스로의 선택이었는지도 이제는 무의미하다. 의미를 단정지을 수 없는 순간들이 연속되고 점점 안으로, 밑으로, 속으로 숨어버리고만다. 정의를 좋아하던 아이는 정의 내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로, 정의 내리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결국 내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고 말았다. 저 여기서 내려요. 그 아이가 내린 도착지는 과연 어떤 곳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이곳에 남겨진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알 수 없다. 저 여기서 내려요. 하고 말하던 아이는 붙잡힘을 원했던 걸까. 아니, 어쩌면 나중에 그곳에서 함께 출발하자고 나타날 누군가를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무의미는 무기력을 무기력은 몽롱함을 가져온다. 약에 취한듯 우주를 유영하듯 부드럽지만 묵직하게 항해하는 아이는 바닥을 잃는다. 잡을 중심도 없는 주제에 중심을 잡아보려다 무중력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만다. 그 꼴이 퍽 우습기도 하다. 일어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무기력을 애써 이겨내며 자리에 앉아보는 삶 속 유일한 외출은 작은 10평짜리 공간. 그 곳에서 아이는 유리문 밖을 망연히 바라본다. 끔찍히도 끊어내고싶은 그가 혹여 나타날까, 나타나지 않았음 하는 마음으로 그가 나타날만한 곳을 망연히 바라본다. 초점없는 눈동자는 보이지않는 그림자를 좇는다.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무형의 감정이었던 거다. 이를테면 두려움, 일종의 분노와도 같은 감정.
아이는 무중력에 산다. 모두가 땅을 딛고 걸어가지만 아이는 떠다닌다고 느낀다. 발 소리좀 내고 다녀. 과거 누군가에게 들었던 그 말을 다시금 되새긴다. 10평짜리 공간 안에서 그저 지나치는 종업원 쯤으로 여겨지는 지신의 위치를 받아들인다. 아이는 자신이 종착역이 아닌, 경유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겨진 것도 버려진 것도 아닌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 지나쳐 간 이들을 떠올리며 아이는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의 잘못들과 상대의 잘못들을 비교하며 시간을 보낸다. 무중력의 시간은 탓의 시간이다. 둥둥 떠다니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분노 뿐이다. 무던한 감정을 지닌 사람에게 가장 쉬운 감정은 분노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한 적 있었나. 아이의 상상 속 미래는 언제나 혼자였다. 고즈넉한 북카페를 차리고, 자신이 써 온 글들을 에이포에 무심히 인쇄해 한 켠에 자리해두는 것. 그곳에는 사람이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아이의 미래에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아이는 예언자의 성질을 갖고 이 세상에 쏟아진 사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이는 그 이상은 예언할 수 없다. 상상 속 미래에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지. 아이는 기운을 잃어가고 무중력에 갇히며 자신의 능력을 잃는다. 부유하는 먼지들을 바라보며 나타나지 않았음 하는 사람이 나타날만한 방향에 신경을 곤두 세우는 것. 아이는 투명한 유리벽도 감옥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이 딛을 수 있는 바닥의 무서움을 학습한다. 무중력 밖의 세상은 감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믿어버린다. 아이는 과연 무중력을 벗어나 중력 속의 세상을 걸어갈 수 있을까.
다시금 아이가 오를 기차는 어디를 향해 나아갈까. 아이가 오를 수 있는 기차는 언제쯤 나타날까. 밖과 안의 온도차에 서린 서리처럼 불투명하다. 불투명함 속에서 아이는 무의미를 배우고 무기력에 지배당하며 불투명함에 안전하다고 믿는다. 우직과 우매의 차이는 극도로 작은 틈의 차이라서, 자신이 우직과 가까운지 우매와 가까운지 알지 못한다.
아직 잃을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부모와 강아지를 잃는다면 아이는 자신도 기꺼이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의 자신은 여전히 무중력 속에 살며 애써 중력 속 세상을 무시할까. 아이는 무시하는 법은 알지만 치유하는 법은 모른다. 돌보지않은 한 부분이 얼마나 곪아 있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어한다. 무중력 속의 예언자 아이는 그렇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