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종종 타인이 인격체를 지닌 한 생명체라는 걸 잊고는 한다. 그저 나의 욕구를 채워줄 하나의 타자로 인식한다. 그러다 어느날 타자로 인지하던 생명체가 인격체를 지닌 생명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그때면 심연의 무언가와 눈을 마주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저들도 저들의 인생에서는 저가 주인공일 텐데. 그렇다면 나는 저 생명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너무 안일한 생각으로 저 생명체와 마주하고 있었구나. 그러면서 나를 돌아본다. 내가 그에게 뱉었던 말과 손짓 그리고 나도 알고 있는 인간을 혐오하는 표정.. 같은 것도 지었을까... 아무리 하등하고 미개한 인간이란 생명체일지라도 그 생명체의 생이 다 하는 순간에 어떤 식으로든 내가 첨가되어 있지 않기를 바란다. 고3학생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것 또한 같은 이치다. 한 생명체의 중요한 순간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 아 , 그 중요한 순간에는 "죽음"도 포함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탄생과 번영 그리고 죽음이니까. 잠깐 이야기가 샛길로 샛다. 다시 정비하자면, 나는 생명체를 그저 "나"를 위한 어떠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타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타인이 지닌 그 시선을 바라보는 거지. 하지만 이 계산에는 실질적 이익을 따지지않는다. 따지자면 무형의 이익이다. 나의 계산은 철저히 학습된 것이기 때문에. 내 계산의 영역에 범법행위를 절대로 건들이지 않는다. 뭐, 데이트 폭력 일환으로 가스라이팅이 범법행위로 판례된 선례가 존재하긴 하다만 그건 민사소송이니까. 아, 또다시 샛길로 새려한다. 하여간 내 의식의 흐름은 나조차도 종잡을 수 없다. 나는 정말 소리없는 수다쟁이인게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생명체가 인격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시즌이 존재한다는 거다. 나는 이 시즌을 스스로 "각성기"라고 부르곤한다. 사람다워지는 시기라고 해야할까. 어려서부터 경계성 인격장애를 지닌채 태어난 나는 공감능력보단 계산능력이 더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공감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행위이며 그 행위는 삶을 연명하는 데 있어 탁월한 효과를 지닌다." 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했다. 삶을 현명하게 연명하는 방법은 공감과 이해 그리고 수긍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이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끼어든 편집증과 우울증은 나 자신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모든 학습과정의 기반이 "윤탄한 인생"이었건만 "인생"을 부정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인생을 포기하려 했다는 과거에 대한 변명아닌 변명인 셈이다. 아, 또다시 샛길로 빠진건가. 하여튼 하려던 말은 나는 공감조차도 "해야되니까" 했다. 이제는 "해야되니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한다". 상담선생님의 최종 목표와도 같은 거다. 하지만 선생님도 한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공감과 이해 그리고 수긍이 습관화되면서 "생명체를 인격체로 인식해야한다." 는 기본 전제를 인지하는 순간이 사라진다는 사실말이다. 지속적으로 인격체라는 것을 인지하며 존중해야함을 부각시켜야하는데, 무의식적으로 진행하다보니 생략시켜버린 거다. 일전에는 강박적으로 저것도 인간이다 저것도 사람이다 저것도 인격체다하며 상기시켰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인격체로 여기는 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살아가다 각성기가 찾아오면 그곳이야말로 심연이다. 나조차도 잊고 사는 나의 본질. 나의 인격장애. 나의 어긋남.
사실은 내 사람이라는 경계를 정해준 것도 하나의 학습이었다. 나같은 심리구조를 가진 사람은 준비없이 리더에도 오르면 안된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되 하나의 소속에서 여러 사람을 거느리면 안된다는 거다. 이왕이면 ceo면 몰라도. (당시의 나는 어렸기에 그 소속이 사적인 소속이었다. 학생이었으니까.) 나같은 성질의 사람들은 조종하려하다보니 거짓말을 무의식적으로 행한다. 그 거짓말은 큰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 나의 상태나 감정 그리고 상대방을 헤아리는 마음 따위를 "듣기 좋게" 포장해서 전한다. 그 과정에 거짓말이 어리는데 소속이 되어 있는 다수와 어울리다보면 그 거짓말이 들통나고 그 들통남이 파국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의 집단생활이 괴로웠던 건. 소속을 지녔어도 다수와 어울리는건 병적으로 기피해왔는데 어쩔 수 없었나보다. 하여튼, 내 사람이라는 경계는 일종의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조차도 혼동이 온다. 내 사람이라는 공간을 학습시켜 생성해뒀으니 채워야한다는 강박증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내 사람들을 인격체로 바라보았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
이런 과정을 부정이라고 한단다. 참 내가 생각하는 의식의 흐름들이 크게 보면 학술용어로 정의된다는게 웃기다. 그들의 연구에는 큰 노력들이 있었겠지만 결국은 이 복잡한 것들을 단어 하나로 정리한 것 아니겠는가. 당사자는 지속되는 모순에 미쳐가는데 그들은 자신의 연구가 들어맞았다며 좋아하고 있겠지. 경계성 인격장애자들은 치료기간이 지속될 수록 지독한 모순에, 부정에 빠진다. 학습되어 만들어진 자아로 살아가야만 하고 살아가야하지만 본래의 자아는 언제고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사실 각성기의 사람다움은 이 둘 사이의 자아를 일컫는다. 본래의 나와 학습된 나의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나. 그 어중간한 나가 그나마 사람답다. 하지만 그 어중간한 나는 의식적으로 꺼내올 수가 없다. 정말 무의식의 존재여서 나조차도 모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라지고 나면 심연을 마주하는 건 어떤 나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나는 그대로 나로 존재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을 뿐이다. 아, 지금 잘못하고 있구나. 학습된 나로 살아야지. 지독한 파블로프의 개다. 반복 학습은 습관으로 습관은 무의식으로 무의식은 망각으로 ... 예견된 부정인 거다. 그래, 연구자 그대들은 위대하다.
잠깐, 무슨 글을 토해내려했었지. 또 다시 샛길로 빠졌다. 어쩔 수 없다. 나같은 사람들은 원래 그렇단다. 뭐라더라. 이익계산을 위해 두뇌회전이 비등히 빨라서 한가지 생각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나. 그러니까, 생각을 시작한 시점에 무의식적으로 결론에 도달해서 의식적으로 다른 생각이 생겨나버린다는 거였다. 그래, 너네 참 잘났다. 그래서 나는 읽는 것에서 멈추지않고 글을 쓴다. 진득하게 한가지 생각을 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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