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º*º*º 쓰다 º*º*º/˚읽고쓰다

[세계의 호수_정용준 작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이거구나"할만한 글

arte(아르테)출판사. 정용준 작가의 세계의 호수

 

  요즘 내 상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면 "인생이랑 서먹하다." 정도랄까. 이럴 때면 어느정도 로맨스가 가미된 소설이 읽고싶어진다.

인생과 서먹해질 때는 종종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우려질 때니까. 그렇게해서 찾게된 것이 정용준 작가의 <세계의 호수> 책을 구입한 날 읽으려고 펼쳤는데 '이별한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 커다랗게 다가와서 덮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대게 한국인이라면 말을 끝까지 들어야하듯, 소설책은 끝까지 읽어보아야한다. 첫 문장의 힘을 믿고 말이다.

 

  줄거리는 간략하게 "이별한 연인과 만나버린 '나'"로 정리될 수 있다. <세계의 호수>는 줄거리가 아니라 줄거리 속 "대화"에 힘이 있다. 우연히 '빈'에 가게되었고 또 우연히 '빈' 옆에 헤어진 연인이 살고 있다던 '장크트갈렌'이 있었고, 또 무심결에 헤어진 연인에게 '메일'을 보내게되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된 연유인지 헤어진 연인에게서 '볼 수 있으면 보자는 답장'을 받게된다. 그게 전부다.

 

  2010년대 후반 부의 소설에서는 화자가 소설가 (혹은 영화감독, 희곡작가 등)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김영하 작가의 <흡혈귀> 이후로 더 자주 나타나는 것 같은데,, 개인적인 착각일 수도 있다. 하여튼, 해당 소설의 화자 홍윤기는 영화감독이다. 영화 한 편의 성공 이후 몰락한, 그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남자. 그는 강의라도 하기 위해 서울 부산 전주 강릉 어디든 달려간다. 그는 그렇게 7년 전 헤어진 연인 무주를 잊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 앞서 말했듯 이 소설은 줄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싶은 것은 없다. 애초에 나는 책을 읽을 때 줄거리보다는 문장을 소중하게 읽는다. 읽을 때 펜은 딱 두개. 검정색 볼펜과 형광펜이다. 배우고싶은 문장에는 검정색 볼펜을, 마음에 와닿는 문장에는 분홍색 형광펜을 사용했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유럽이 움직였다."

 

  주어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소설을 쓸 때마다 이런 문장을 쓰곤 하는데 성공률은 대략 20%정도. 주어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문장은 내제된 의미도 통일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 어렵다. 쉽게 읽히지만 어렵게 쓰이는 대표적인 구성이라고도 생각한다. 해당 문장 이후 화자인 홍윤기는 무심결에 헤어진 연인에게 메일을 보낸다. 해당 문장은 그것까지 암시한다. '손가락'하나로, '유럽'이라는 거대한 대륙이 움직이니까. 커다란 유형의 물질을 거뜬히 옮겨버리는 손가락이 사람 하나 못움직일까.

 

 

"그는 억지로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의 공기를 수다로 없애려 하지 않았다."

 

  배우고싶은 자세다. 나는 낯을 가리면서도 어색한 상황에서는 나서서 말을 꺼낸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 어색한 공기를 즐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 하지만 그걸 잘 하는 사람이 실존할까? 아직은 만나보지 못했다. 서너 번의 만남 이후 대화없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은 만나봤어도.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한국의 영화감독. 한국 좋아요. 웰컴! 끝."

 

  내가 좋아하는 문장 구성 두 번째. 간단한 영어가 갖고 있는 힘을 좋아한다. 예로, 한 번은 소설 속에 "Hi" 라던가 "헬로우 메리크리스마스"를 적은 적이 있다. 분위기를 환기시킬 때 종종 생각해보는 방식.

 

 

"아무리 찾고 찾아도 발견되지 않는 것. 그것은 단어가 아니라 어쩌면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

같은 단어를 쓰지만 사실은 다 다른 언어들. 쉬운 단어일수록 단순한 진술일수록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심히 공감했다. 분명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 너의 단어와 나의 단어는 많이 차이가 나고는 한다. 한글은 그래서 참 어렵다. 같은 단어더라도 배경지식, 경험, 사유 등, 사소한 것이 달라지면 내포된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할아버지"라는 단어도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혐오감을 나타내는 단어가 될 수도 누군가에게는 호감을 나타내는 단어가 될 수도 있다. "부모님"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다.

 

 

"이를테면, 요즘 한국 소설가들은 왜 대화에 큰따음표를 쓰지 않는지, 그렇게 문법을 파괴해도 되는 것인지 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의문이다. 문장에서는 문장보호 역시 하나의 문법으로 작용한다. 언제부터였을까. 대화체가 지문과 함께 섞여 사용되기 시작한 시점은. 아주 짧은 시간 생각해봤으나 명확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왜 그렇게 썼지. 그렇게들 쓰니까. 그리고 사실은 나는 대화를 많이 쓰지 않는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다보니 헛점을 숨기고자 그렇게 된 듯하다. 대부분 내 소설 속 대화는 텍스트 그러니까 채팅의 대화를 인용한다. 대화가 많지 않으니 대화는 주로 강조를 위해 큰 따음표를 사용하는 쪽이다. 그럼에도 대화가 많은 소설은 큰따음표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금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듯하다.

 

"만나고 싶고 만나고 싶지 않다. 잊었지만 잊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지만 보고 싶다.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왜 만나면 안 되는 건지 의문을 품고 있다."

 

  말 장난. 소설 후반부에서 무주는 이런 윤기의 말장난이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왔음을 알려준다. 사실 나는 현실에서 이런 말장난을 즐긴다. 이런 말장난을 소설에서 '이토록 길고, 잦게' 사용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조금은 힘을 빼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다짐.

 

 

"어제의 문장과 오늘의 문장의 다름과 뉘앙스의 차이를 짚어냈고 원래 쓰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어서 내 마음에 맞게 문장과 이야기를 고쳐주기도 했다."

 

  배수종의 <무종>이 문득 떠올랐다. 한 문장이 한 문단을 차지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한 쪽을 차지하기도 했던 소설. 

 

 

"나와 닮은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 모두 한심해서 동족 혐오가 생겼다. 눈빛에 무시하는 기색이 조금만 담겨도 알아챌 수 있고 음성에 조롱이 살짝 섞여 있어도 감각한다."

 

  누가 내 얘기를 정용준 작가에게 들려줬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름돋게 지금의 나의 상황과 들어맞는다. 나와 닮았기에, 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서 동족 혐오가 찾아온다. 파악할 수 없는 의도들은 스트레스를, 파악할 수 있는 의도들은 혐오를. 참 악의 굴레다.

 

"항상, 이라니. 7년 만에 만났는데 그런 표현을 쓰니까 기분이 묘했다."

 

  신기한 문장이라서 표시. 왜 신기하다고 느꼈냐면,, 나라면 이 표현을 한 문장으로 끝내지 못했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였으면 "항상이라는 표현이 걸렸다. 나와 무주에게는 7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하는데. 항상이라는 단어를 쉽게 뱉어내는 무주가 …" 등.. 이런 식으로 적어도 5문장은 사용했을 것 같다. 배움은 언제나 부족한듯. 단 한 줄의 문장이지만 많은 걸 배웠다.

 

"횡설수설해도 알아서 순서를 맞추고 내가 표현 못 하는 감정이나 느낌도 설명해줬던 사람. 때론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까지 듣고 알맞은 답을 먼저 말해줬던 사람. 무주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무주가 없으니 말할 수가 없다. 외롭다기 보다 몹시 심심한 느낌. 슬픔보다는 쓸쓸한 기분."

 

  그냥 한 번 읽었다. 무주를 우주라고 읽었다. 나(윤기)가 아니라 무주가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읽었다. 그렇게 총 세 번 읽었다.

 

 

 

"여행지의 사건을 삶으로 끌고 오지 마세요."

 

  이것도 한 문장으로 잘 표현했다. 배워야지.

 

 

"무주는 마음을 말하지 않았고 묘사도 하지 않았다. 간혹 무슨 말을 하더라도 눈동자와 표정에서는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어두운 전망이 보였다. 말해보라고, 설명해보라고 채근하면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그저 나를 꼭 안아줬다. 걱정 마. 괜찮아. 이런 말만 했다. 그나마 무주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건 책에 그어진 밑줄을 발견할 때였다."

 

  읽으면서 화자인 '나'와 무주에게 번갈아가며 몰입한다. 이 문장도 어쩜 나를 이렇게 옮겨놨지. 처음 책에 밑줄을 긋기 시작한 때를 떠올린다. 나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지. 하지만 아직 나의 책을 공유할만한 사람은 오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없고, 없다. 참 희귀하다. 왜일까.

 

"나는 아니고 발저가 그랬어. 작가는 글을 쓸 의무에 용기를 다 써버린 까닭에 사랑에 빠질 용기가 없는 자라고. 알다시피 난 글러먹었어."

 

  한 10번 읽었다. 이정도면 진짜 정용준 작가님에게 지금 내 상태를 면밀히 전달한 듯 하다.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지만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었나. 당당하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난 글러먹었어."

 

 

"운 좋게? 운이 좋다고? 나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저었다. 나쁜 생각과 한심한 마음이 들 때마다 의지적으로 골똘해지지 않으려는 습관이었다."

 

  대체 누가 내 상태를 전달한걸까. 감명깊은 소설은 많았지만 공감가는 소설은 처음이다. 

 

 

"감춘 마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그 마음이 품고 있을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알고 감춘 게 아니라 몰라서 감추고 있는 것. 사라지지도 소멸되지도 않은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내가 모르는 마음."

 

  가장 두렵다. 감춘 마음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과 '알 수가 없는' 것이 있다. 당연히 후자가 무섭다. 어느 날 갑자기 알수도 없던 그 마음이 거대해지면 무너지고 말테니까. 나도 심리를 풀어내는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인물'과 '심리'에 약하다. 

 

 

  감탄하고 봤다. 어쩌면 이 장면을 머릿 속에 상상해두고 "빨리 이거 써야되는데"하며 여기까지 쓰지 않았을까. <세계의 호수>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이 장면이다. 

 

"너는 떠나지 않는 방식으로 떠났어. 거부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부했고. 내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원하지는 않았지. 너와 있으면 항상 척력이 느껴졌어. 멀리 있을 땐 인력이 느껴졌는데 가까워지면 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힘이 느껴졌어."

 

  요즘 트랜드는 '과학적 사실이 가미된' 소설이라고 한다. 그 트랜드를 맛볼 수 있었던 문단. 이번에 나는 소리에 대해서 쓸거다. 소리와 진동 소리와 빛 그리고 공명.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았어.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런 책은 안 읽고 싶었어. 내가 간절히 원했고 사랑했던 것들은 너를 포함해 모두 나를 떠나는 것만 같았지. 그게 무서웠어. 점점 견디기가 힘들었고, 절절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불안하고 싶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어.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있고 싶었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대목이지 않을까. "글을 쓰고 싶었지만 그런 글은 쓰고 싶지 않았어.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런 책은 안 읽고 싶었어."라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이런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참, 정용준 작가는 성찰도 그렇고 복잡한 내면을 쉽게 풀어내는 것 같다.

 

"그걸 가장 믿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너야."

 

  이번에는 내가 홍윤기가 되었다. 무주가 말하는 "너"가 내가 된 기분. 무주와 윤기를 통해 정용준작가는 계속 독자와 소통한다. 흠칫,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들키고싶지 않는 것을 들킨 느낌. 

 

 

"바로 곁이 아닌 적당한 거리에 나를 두고 사랑하냐고 묻는 내 말에 너는 아무 감정도 없이 기계처럼 말하곤 했지. 알면서 그래."

 

  대화체를 정말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관찰하고 기록했을까. 지문으로 읽으면 복잡한 문장이지만 대화로서 해당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읽힌다. 그래서 그런지 무주와 윤기가 진짜 나한테 얘기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구성. 실제로도 많이 쓴다.

 

  작가 노트까지 완독. 

 

 

2021.09.03 읽고 2021.09.04 씀